실존주의의 배경
실존주의(Existentialism)는 그 이름이 표현하는 대로 존재(existence), 특히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면서 출발한 실존주의는 현대문명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항으로 등장하였다. 현대사회는 불특정 다수인으로 형성된 대중사회 즉 익명성의 사회이며, 인간의 개체성과 주체성을 말살하고 획일화된 일반법칙을 강요한다. 바로 이러한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나’를 상실한 비 본래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나’의 새로운 탄생을 갈망하고, ‘나 자신’의 주체성과 개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 실존주의가 추구하는 기본적 주조음 이라고 할 수 있다. 19, 20세기의 두 세기에 걸쳐 덴마크·독일· 프랑스·미국 등 여러 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제창되었고, 그 주역을 이루는 학자들이 다같이 탁월한 인물들인 까닭으로 해서,「이것이 실존주의의 원리요」하고 내세우기 어렵다. 19세기의 실존주의가 유럽의 중산 계급의 자기만족에 반항하는 새 도전이라고 한다면, 20세기의 실존 사상은 중산 계급의 불안에서 오는 산물이라고 하겠다. 전통적 철학의 영역을 벗어나 이단적 시도인 실존주의는 신구대륙에 걸쳐 철학자는 물론, 문학가·신학자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지도적 인물들이 이에 가담하고 있다는 점 또한 특징이며, 실존주의를 정의하기 힘든 하나의 요소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문과학 > 철학
실존주의의 지향
사람은 이끼나 부패물이나 꽃양배추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관적으로 자기 삶을 이어 나가는 하나의 지향적 존재이다. 이 지향 이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고 하나의 뚜렷한 그 무엇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되고자 지향한 그것이다. 되고자 원하는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지라고 보통 부르는 것은 의식적 결정이어서 우리들 대다수에게 있어서 그것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정당에 가입하기를 바랄 수 있고, 책을 한 권 쓰고 결혼하기를 바랄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소위 의지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자연적인 선택의 표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말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면 사람은 자기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이래서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의 임자가 되게 하고, 그에게 그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사람이 자신의 엄격한 개성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은 모든 타인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실존주의 철학과 교육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재상황으로 인생의 외로움·불안·고뇌·번민·허무·무기력·무의미·무규범·무목적·부조리·권태·절망·고통비극·죄의식·죽음 등에 관하여 관심을 갖는다. 이렇게 보면 실존주의는 인간 상황에 대하여 대단히 비관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이 때문에 논자에 따라서는 인간의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면을 추구하는 교육에서는 실존주의 교육철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면만을 보고 실존철학에 대하여 판단해서는 안된다. 실존주의에서는 인간 존재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것을 이해하고 그 부정적인 측면을 초극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주의는 허무·불안·책망·외로움 등 인간존재의 한계상황의 분석을 통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흔히 인간의 삶을 낙관적인 면보다는 주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나머지 독백(獨白)적이고 푸념이 될 수 있다는 비난을 받으며 그것을 교육에 과연 적용 될 수 있느냐란 문제도 내포하고 있지만 그런 것에 관계없이 새 인간관, 새 문화관, 새 우주관을 모색하는 교육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실존주의의 역사
실존주의는 19세기말의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에서 오는 자기 상실, 20세기초의 민족혁명, 사회혁명과 1,2 세계대전이라는 불안과 위기로부터 나온 불안의 철학, 위기의 철학, 반 역의 철학이다. 현대 문명의 비인간화에 대한 반항과 기술문명과 관료기구 그리고 객관 주의에 대한 항변, 산업사회에서의 조직화로 인한 인간소외에 대한 거부 등 현대 사회 속에서 진정한 나 자신의 주체성과 개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 실존주의가 추구하는 것 이다.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실존주의는 불안과 위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위기를 뚫고 본래의 자기를 바로 찾으려는 철학이다. 제1차 세 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실존주의의 개념
실존이라 함은 말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의미한다. 세계2차 대전 당시 서구를 주름 잡았던 철학이 바로 `실존주의`이다. 유태인 대학살 이후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인간존재에 대한 새로운 검토를 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활약하던 사상가 사르트르와 까뮈는 두 가지 공통적인 사상을 가졌다. 첫 번째로, 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매우 중시 여겼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트뤼포의 영화 `400번의 구타`에서 주인공 앙뜨완느는 가족과 화합하지 못하고 거짓말과 도둑질을 해가며 소년 감옥소까지 들어가지만, 결국 그는 그곳을 탈출하여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바다로 달려간다.
마르크스주의의 성립배경 및 과정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의 마르크스주의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여파가 유럽의 정치와 사회에 격심한 파동을 일으킨 격동의 시대 산물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정치적으로는 봉건적 전제 군주제를 전복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토대를 마련하고, 사회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계급으로 등장과 시민적 자유를 확보하는데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혁명의 기치로 내건 이념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도화되지 못하였다. 또한 전형적인 부르주아 시민혁명으로 민중의 대부분인 농민과 노동자는 혁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혁명의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이 근대 이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인식되었으며,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각국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도록 하였다. 특히, 당시 서유럽의 의식과 양심 속에 인간평등의 관념을 심어 놓았으며, 이것은 그 후에 일어난 각종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에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형성과정에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산업혁명이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으로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사회?경제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생활의 편리를 증대시키고 자본주의의 발전토대를 확립했다는 긍정적 결과 이면에, 도시로의 인구집중으로 인한 도시문제나 노동문제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등 부정적인 결과를 동반하였다. 더구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등장은 계급투쟁을 불러 일으켰으나, 기존 이론으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새로운 역사 해석 이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마르크스의 관념론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기존의 관념론에 대해서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 우리는 흔히 생각, 관념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발명품이나 발명은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의해서 나온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의식은 모든 생활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컴퓨터가 성능이 좋아지는 것은 누군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종전의 컴퓨터를 쓰면서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을 느끼면서 조건이 좋은 업그레이드된 컴퓨터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즉 새로운 생각이나 관념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환경, 조건에 의해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의 유명한 말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흔히 이 '규정한다'는 말을 '결정한다'라는 말로 잘못 쓰고 있는데 사실 맑스는 물질 결정론자가 아니다. 그러한 유물론자들 역시 그의 매서운 비판을 받았다. 관념이나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요소를 부정 한 적은 없다. 다만 상대적으로 그것이 나오게 된 배경, 즉 물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유물론은 일반 사람들의 생활철학이다. 장전동 국밥집 아줌마는 유물론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루 하루의 매상이다. 그렇다고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장의사는 누군가가 매일 죽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그가 살인자와 같은 사악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하고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관념은 그들의 생활조건에서 치열한 삶에서 나온 것이다. 관념론은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의 사상이였다. 관념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 대다수의 대중들과는 동떨어진 사상이다. 유물론(materialism)은 구체주의란 말이 더 적합하다. 구체적인 것, 현실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식보다 관념보다 더 선행한다는 맑스의 생각이다.
나치즘의 성격
히틀러 휘하의 나치의 국내 정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개인의 모든 생활과 생각을 민족과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통제라는 개념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전체주의자인 히틀러에게 있어 정의의 기준은 민족이었고, 따라서 그는 모든 개인을 민족이라는 전체 속에 예속시키려고 하였다. 무엇이 민족의 정의이며 무엇이 민족의 이익인가 하는 것은 민족의 지도자인 히틀러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곧 국가의 정책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에 반대한 민족 반역자들을 제거할 수단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민족 재판소를 설치하고, 게슈타포로 알려진 비밀 경찰 조직을 창설했다. 그것은 히틀러가 지시한 노선에 따라 국민 생활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치 지배 밑에서 이루어진 일 가운데서 흥미 있는 것은 노동자의 직업이 정부에 의해 고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노동자를 국가 차원에서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나치 휘하에서 독일은 기업, 종교, 문화 등 모두가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된다.
나치즘의 정의
아돌프 히틀러를 당수로 하여 1933년~45년 정권을 장악했던 독일의 파시즘 정당 ‘나치스’의 정치사상 및 체제로서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 NSDAP)이다. 19세기 말엽 유럽에 일반적으로 공통되어 있던 반(反)유대주의, 백색인종지상주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및 반(反)사회주의와 반(反)민주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발생하였다.
허무주의의 정의
허무주의는 기존의 전통가치가 상실되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지는 의식현상이다. 이것은 당시 서구사회의 정신적 상황이었다. 중세 이후의 기독교적 사상들은 근대의 사상가들에 의해 박살난다. 즉 목적론도 해체된다. 이원론에 대한 믿음도 사라졌다. 하지만 근대의 상황은 이러한 기존의 사고는 거부했지만 새로운 사고나 가치를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허무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가치가 몰가치화되고, 목표가 없으며, 무엇 때문이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없는 상태였다. (목적론이 붕괴됐으니) 그래서 니체는 그 당시를 허무주의 시대라고 진단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제목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른바 "제 1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앎을 갈망한다"는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이 본유적 갈망은 단순히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 혹은 어떤 것을 만들기 위해 알려고 하는 갈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실용적 동기들 이외에도 인간에게는 단순히 앎 그 자체를 위하여 어떤 종류의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려는 갈망이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감관(感官)들이 그 자체로 누리는 기쁨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각이 우리에게 사물들간의 많은 차이들을 구별해 주는 한에 있어서 사물들의 유용성과는 별도로 그 사물들이 그 자체로 진리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지식에는 여러 수준들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감관을 통해 경험한 것만을 인식한다.
관상의 정의
우리는 어떤 업무상이든 사교적인 만남이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때는 상대방에게 가급적 좋은 인상을 주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적어도 수염 정도는 깎고 옷차림과 얼굴을 청결히 하고 밝은 표정을 지어 상대방에게 언짢은 인상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보통사람의 마음가짐이요, 위인일수록 그 점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인간관계가 원만해야되고 또 원활해야 하는 법이다. 물론 원활하지 않더라도 그런 대로 일이 성취되는 수도 있지만 만날 때마다 껄끄러운 관계는 오래도록 유지되기 힘든 법이다. 이런 점에서 유의해야 하는 것이 ‘사람을 보는 눈’이며 ‘남에게 보이는 내 자신의 얼굴’이다. 사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외모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 외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내적인 아름다움을 가꿔야 한다고 교육받아 왔다. 하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은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겉으로 드러난 외모를 보고 스스로를 판단할 뿐 내적인 아름다움까지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은 외적인 요인에 좌우되기 쉽다. 사람이 외적 요인에 의해 사람을 판단한다는 외모가 그 사람의 내면을 반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인상은 그 사람의 감정에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 순간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을 표정이라고 하는데 표정이야말로 관상학의 기본이다. 동물 중에서도 얼굴에 표정을 제일 잘 나타내는 인간은, 표정이 풍부하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마음 속 깊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얼굴에 표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특성을 역이용하되, 몸의 외견, 특히 안면의 특징 및 동작을 보아 그 사람의 심적 특성을 읽어내고 나아가서는 그 사람의 운명을 맞추며 장래 일을 예견코자 하는 것이 인상학 혹은 관상학이라는 학문이다.
유교의 역사적 배경
삼국사기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다는 기록으로부터 본다면 유학의 공식 전래는 1600여년 이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학이 처음 전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중국의 제도를 본따 국립대학을 세웠다는 것이고 유학사상은 이미 그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을 할 수가 있다. 에 보면 위만 조선 시대에 연소왕(燕昭王) 29년(BC 283)에 조선후왕(朝鮮侯王)이 연나라와 외교관계를 행하였다고 하니 당시 한자의 전래와 아울러 한자속에 내포한 유학사상을 이미 습득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유학이 전래된 과정은 다음과 같이 4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가 있다. 첫째는 삼국시대에 들어온 한대의 오경사상이고, 둘째는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에 들어온 수당대의 문학적 유학사상이고, 셋째는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들어온 주자학인대 이것은 송대의 성리학을 대표한 것으로 근세 학술 문화사상에 획기적인 영향을 준 것이라고 할 것이다. 넷째로는 조선 후기에 들어온 청대의 실학사상으로 이것은 서학의 전래와 더불어 새로운 근대적 서구문명에 접함에 따라 실사구시의 학풍을 이루게 되었다.
공자의 생애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B.C. 551년, 노양공 22년). 그의 조상은 원래 송나라의 귀족이었으나 노로 망명하였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자가 숙량이었다. 그러므로 보통 숙량흘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낳을 당시 10대의 어린 소녀였다. 60세가 넘은 숙량흘은 안씨의 셋째 딸을 후처로 맞이한 것이다. 공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즉 어머니가 이산에 기도를 드려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의 머리 가운데는 들어가고 나온 데가 있어 이름을 구(丘 : 언덕)라고 했다고 한다. 무인이었던 공자의 부친은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시고, 모친은 그가 24세 때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릴 적에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베푸는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비범한 자질을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에게는 고정된 스승이 없었다. 그는 다만 타인의 장점을 본받고, 단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공은 '우리 선생님께서야 어디에서나 배우시지 않은 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찌 정해진 스승이 있겠습니까(자장-22)?'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이미 30대 청년시절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삼환씨였다. 이들은 국토를 채읍으로 삼고 군대와 가신을 길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공은 계평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삼환씨의 단결된 무력에 패하여 그는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유교의 영향
유교에 대해서는 고등 학교 시절 윤리 시간에 유교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 이미 배운바 있으며 우리 생활에 내재해 있는 관습인 한국적 유교는 이미 우리의 몸속에 깊숙이 베어 있다. 그러나 유교는 중국 대륙에서 전래 되었으며 유교의 중심 인물로는 공자를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유교라는 것은 비단 중국 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에는 거의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주변국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인,의,예를 중요시하는 이 유학이 정치 사상적으로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나라는 다름 아닌 우리 나라, 구체적으로는 ‘조선’이다. 유교의 뿌리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고 그 보수성이 잘못 발전되어 ‘동성동본금혼’ 등 폐단을 낳기도 했다. 공자와 유교는 사회의 구석 구석에 남아 우리가 태어남과 동시에 무의식 중에 교육되기 시작하고 죽을 때까지 정신의 일면을 지배한다. 현재의 우리는 개항 이후 100여 년 간 서양을 동경하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한 바, 입는 것, 먹는 것, 심지어는 얼굴의 생김새와 체형도 그들을 닮아가고 있다. 그러나 정신은 완전히 서양화 되지 못했다. 서양과는 뭔가 다른 것이 우리의 내부에 있어 그들과 우리를 단지 피부색만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구별되게 해준다. 그 “차별화”. 그것이 공자의 사상이요, 유학의 영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