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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지형

- 발트 순상지가 중심을 이룸 (평탄한 지형) - 대부분 지역이 저고도와 낮은 굴곡의 지형 - 평균 해발고도는 345m - 200m 이하의 평지인 평원이 전체의 1/2 이상을 차지함 - 유럽의 산 : 거의 대부분의 산맥이 남부 유럽에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음 - 유럽의 평원 : 주로 북부 유럽에 발달, 프랑스, 동유럽 - 유럽의 구릉 : 주로 중부 유럽에 발달 - 유럽의 하천 : 알프스산지를 중심으로 북-북서방향 중부 유럽을 통과하여 북해, 대서양, 지중해, 흑해, 발트해로 유입되며 유량이 풍부함 - 일반적으로 고도에 따라 산지, 구릉, 분지, 평원으로 나뉨 - 산지 : 유럽의 산맥은 주로 동서방향이고 남북방향을 가로막는 큰 산맥이 별로 없음 대서양을 통해 유럽으로 진입할 경우 자연적 장애물이 거의 없는 지형 북부유럽에 속하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북부는 고원성 산지로 형성됨 중서유럽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알프스산지는 헤르시니아 조산대☞약 2억 8천만년~ 4억 8천년(대본기와 석탄기에 발달)의 용기지층 및 단층지괴들로 이루어져 비교적 기복이 심하고 고산들이 위치함 남부유럽에 속하는 이베리아반도와 발칸반도에도 고산들이 위치함 - 분지 : 유럽에는 빠리분지, 헝가리분지, 보헤미아분지☞체코 등과 같은 여러 분지들이 발달되어 있음 유럽의 구릉들은 남부유럽의 산지와 북부유럽의 평원지대 사이인 중부유럽에 주로 위치함 - 평원 : 유럽에는 빠리평원, 북독일평원, 동유럽 평원 등의 대평원들이 발달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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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3국

발트 해 남동 해안에 위치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총칭이다. 예로부터 이민족과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8세기에는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1918년에 독립하여 세 공화국이 되었으며, 1934년에는 발트3국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940년에 소련에 합병되었으며 그 이후로 독일군의 점령 때(1941∼1944)를 제외하고는 민족 공화국으로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민족·언어 면에서 에스토니아인은 우랄계에, 라트비아인과 리투아니아인은 슬라브계 소수민족에 속한다. ⊙합병과정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인들의 선조인 핀족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약5천년 경으로 추산되고 있다. 1220년경 독일인들에 의해 정복당한 이후부터 독일제국과 1560년경까지 예속관계를 유지해오다가 그 후 러시아와 폴란드의 지배를 거쳐 17세기에는 지배권이 스웨덴으로 넘어갔다가 1710년경 다시 러시아에 정복당했으며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후 에스토니아의 자치가 허용됐었다. 1918년 초, 국민투표에서 63%의 지지를 얻은 볼셰비키지도자에 의해 독립이 선언되었으며, 그 후 2년에 걸친 독∙소 분쟁에서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1940년까지 독립을 이룩했었다. 그러나 1939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의해 에스토니아 내에서의 소련의 활동을 보장하였는데 그 여파로 1940년 6월 돌연 소련군이 에스토니아 전역을 장악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 전권을 장악하였다. 에스토니아인들은 1940년 소련에 합병될 당시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으며, 강한 문화적 일체성을 수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민족적 일체감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라트비아 라트비아 공화국은 1940년 8월 소연방에 병합된 무역의 요충지역이다. 리가는 이 나라 수도로서 발트해안의 가장 중요한 무역항이다. 1918년 볼셰비키혁명 와중에서 독립을 선포한 후 20여 년간 독립 상태를 유지해오다가 소련에 의해 합병됐다. 전통적으로 라트비아 농민들은 농경지에 집을 짓고, 별도의 부락을 이루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 지배하에 추진된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많은 저항과 희생이 따랐다.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뒤이어 1940년 6월 무력에 의해 완전히 합병되었다.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는 1940년 8월에 소련에 합병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역사는 인접강대국인 독일, 폴란드, 러시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 얼룩져 있다. 중세에는 독일의 침략에 대항, 폴란드와 연맹하여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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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제주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년전인 신생대 제3기에서 제4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의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화산도이다. 화산 활동 및 빙하 해수면 변동과 지각운동에 의한 지형의 변화에 따라 제주도는 대륙과 연륙 되었다가 또 고도로 변화하는 등 이러한 상태가 여러 차례의 반복으로 인하여 특수한 오늘의 제주도가 형성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의 옛 명칭은 도이(도이), 동영주(동영주), 섭라(섭라), 탐모라(탐모라), 탁라(탁라) 등으로 불리워져 왔다. 이들 명칭 중 `동영주` 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나라`라는 뜻이다. 제주도의 개벽 신화인 삼성신화에 의하면 태고에 고을나(고을나), 양을나(양을나), 부을나(부을나)라고 하는 삼신인(삼신인)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모흥혈, 현재의 삼성혈)이라는 땅 속에서 솟아 나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벽랑국)`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 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제주도 동쪽 해상으로 들어온 삼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탐라국의 건국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정설이 없으나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 국가형태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또한 이 무렵부터 한반도의 남부에 위치했던 국가들과 문화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도의 역사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 우는 부족국가로 이어져 내려 왔으나 웅대한 왕국이나 고도의 문화국가를 이루지는 못하여 백제, 신라, 고려에 속국이 되면서 독립 국가적인 명맥만을 이어 오다가 고려 숙종10년 (서기1105년)에 비로소 고려의 중앙집권제 밑에 들어가 탐라군이 되었으며 제주라는 명칭은 고려 고종 때(서기1214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고려왕조가 원나라의 침략을 받아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삼별초가 제주를 최후거점으로 항거를 전개하므로 고려 원종 14년 (1273년) 몽고군이 제주를 침범하여 약 100 여 년간 원의 직할통치인 탐라총관부에 의하여 외국의 통치를 받은 쓰라린 역사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제주는 버림받은 오지도서 취급을 받아 조선조의 정객 과 학자들의 유배지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이때 유배되어 내려온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등 많은 정객과 학자들의 훈학으로 인하여 제주에 유학의 보급과 문화 발전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효종4년(서기1653년)때에 제주도의 유일한 정사문헌인 ` 탐라지 ` 가 만들어 졌으며 조선조 이후 일제치하를 거쳐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제주도는 군제, 도제 등의 과정을 거치다가 1946년 8월 전라남도에서 분리 `도`로 승격하여 현재 두 개의 시, 두 개의 군, 일곱 개 읍, 다섯 개 면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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