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 그의 일생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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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 그의 일생과 사상

자료번호 s233724
수정일 2004.12.30 등록일 200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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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인의 사상과 생활상 조사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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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강수는 신라인으로 유명한 유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난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선덕여왕(632~647) 혹은 진덕여왕(647~654) 때 출생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으며, 사망한 때는 신문왕 때인 692년이다.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편에 보면 강수는 중원경(지금의 충주시)의 사량부 사람이고 아버지는 석체 내마(혹은 나마, 柰麻)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신라의 관등·관직 관계로 볼 때 11위계이며 5, 6두품이 차지 할 수 있는 관등이다. 그러나 강수가 문무왕 때 사찬(沙湌) 즉 8위계를 제수 받은 것은 그의 골품이 6두품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찬(6위계) 이하 급찬(9위계)까지의 관등은 진골뿐만 아니라 6두품 출신의 자들도 가질 수 있는 관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중원경의 사량부 인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 강수는 문무왕 때 당의 사자가 가져온 까다로운 조서를 탁월하게 해석하고 당황제에게 조서(詔書)에 회사(回謝)하는 글을 지어 해마다 조(租) 100석을 받고, 사찬의 직에 이르게 된다. 이 때 강수는 문무왕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신(臣)은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입니다.” 임나가량은 대가야를 뜻하는 것으로 그의 집안이 가야계 귀족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신라는 통일 이후 당제를 받아들이면서 지방제도 새로운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통일 이후의 지방제를 흔히 9주5소경제라 일컫고 있다. 전국을 9주(州)로 나누었으며 그 아래에 군(郡)을, 군의 아래에는 중고기의 성·촌을 대신하여 현(縣)을 두었으며 그밖에 특별한 행정구획으로는 5소경을 설치하였다. 중원경은 이 5소경에 속하는 것이다. 소경이 다섯 개로 고정된 것은 고구려나 백제의 5부(部)·5방(方)제와는 설치 목적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중고초기와 중대 소경의 설치 목적도 한결같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5소경은 금관소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백산맥의 외곽지역에 설치되었는데, 이곳은 모두 신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요충지였다. 이처럼 복속지역이면서 또한 신라 왕경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소경을 설치한 것은 통일왕국으로서의 수도가 동남구석에 편재해 있다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하게는 고구려·백제·가야 등의 복속민 가운데 유력세력을 이곳으로 집단 사민(徙民)시킴으로써 그들을 회유하고 동시에 감시하기 위한 데 있었던 듯하다. 이런 목적 하에 설치된 곳이 강수가 살았던 중원경(중원소경)으로 이곳에는 강수 외에 우륵(于勒)·김생(金生) 등의 가야계 귀족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가야계 귀족 강수가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계기는 앞서 말했듯이 당 황제의 조서를 해석한 일에 있는데, 《삼국사기》권7의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1년조에 의하면, 당나라 총관인 설인귀(薛仁貴)가 보내온 글에 답하여 신라에서 보낸 글이 강수의 손으로 이루어진 글일 가능성이 많다.


참고문헌

김부식 저, 이병도 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 서울, 1989
강만길 외, 『한국사 전집 3, 4』,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한길사 : 서울, 1994
김동욱 외, 『한국인물답사 1』, 도서출판 오늘 : 서울,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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