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5경과 강역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본 자료는 미리보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발해의 5경과 강역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자료번호 p694999
수정일 2012.09.17 등록일 2010.12.02
페이지수 1Page 파일형식 한글(hwp)
판매자 sp****** 가격 3,000원
  • 다운로드
  • 장바구니

프리미엄자료

  • 동북공정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대응
  • 발해 유적에 대한 한국인의 접근금지’라는 중국 당국의 지침에 따라 접근이 저지되는 사건이 최근 자주 발생되고 있다. 이는 총 3조원의 규모에 순수 연구비만 270억원 수준으로 중국의 정부차원에서 추진 중인「동북공정 프로젝트」때문인
  • 고구려사귀속문제
  • 조공 ․ 책봉관계의 해석 5. 고구려 멸망 후의 문제들 ① 대중항쟁을 통해 본 고구려의 정체성 ② 고구려 유민의 거취 6.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들 - 발해와 고려 ① 발해와의 계승성 ② 고려와의 계승성 Ⅲ. 결론 ※ 참고문헌
  • [문화관광]흑룡강성에 대하여
  • 대한 철저한 지역 조사는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역사문제와 민감한 정치적 사안까지 끌어들이려는 것은 한류열풍에 편승한 장삿속 마케팅이나 일회성 쇼핑에 그치는 관광객 유치가 아니라, 문화와 관광이라는 접근

소개글

발해의 5경과 강역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자료입니다.

목차

1. 발해의 5경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1) 문헌사료로 살펴본 발해의 5경
(2) 5경의 설치시기와 연원
(3) 5경의 기능과 수도 변천
(4) 유적, 유물로 살펴본 발해의 5경
2. 발해의 강역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1) 문헌사료로 살펴본 발해의 강역
(2) 발해의 강역에 대한 제논의
(3) 발해의 최대 강역
(4) 유적, 유물로 살펴본 발해의 강역

본문내용

발해의 5경과 강역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1. 발해의 5경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1) 문헌사료로 살펴본 발해의 5경
‘天寶 年間에 欽武가 도읍을 상경으로 옮기니 구국에서 3백리 떨어진 忽汗河의 동쪽이다…貞元(785~805) 때에 동남쪽 동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흠무가 죽으니 사사로이 諡號를 무왕이라 하였다. 아들 宏臨은 일찍 죽고 族弟 元義가 1년간 왕위에 올랐으나, 의심이 많고 포악하여 國人들이 그를 죽이고 굉임의 아들 華璵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다시 상경으로 還都하고 연호를 中興(중흥, 794)로 고쳤다’ (『신당서』권219, 북적 발해)
‘(光仁天皇, 寶龜 8年 春正月, 777)癸西 (발해의 史都蒙 등이) 남해부 土號浦에서 출발하였다’(『속일본기』권34)
(2) 5경의 설치시기와 연원
5경의 설치시기에 대하여 『속일본기』의 기록처럼 사도몽 등 발해 사신이 출발한 시기는 777년이기에 남해부 즉 남경의 이름이 최초로 나오는 시기는 776년으로서 최소한 5경 설치의 하한을 776년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없다. 이러한 점들에 근거하여 발해의 5경 설치시기에 대해서 견해가 다양하게 제기되어 왔다. 즉 발해의 5경은 대체로 당나라의 4경제도가 완비되는 762년경부터 남해부의 이름이 등장하는 776년 사이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리는 10대 선왕대나 11대 대이진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고 늦추어 보는 견해도 있다. 전자의 견해는 5경을 포함한 15부 62주가 당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보다 먼저일 수 없다는 것으로 중국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발해 5경제의 연원은 오행사상에 입각한 사상사적 의미가 더 강하다. 고구려의 5부제와 신라의 5소경, 백제의 5방제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함은 바로 이러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가 아닌 당나라의 5경에만 의미를 두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그러나 발해의 상경성이 160여 년간 존속하였던 도성이고 당나라의 4경제도는 불과 4년 정도였던 점으로 보아 발해 5경제의 뿌리를 꼭 당나라 다음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도성의 구조라든지 하는 부분에서 도성제가 실시되면서 수용, 변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구조적 계승관계에 있어서도 상경성 등의 계승관계에 대한 시각차가 상존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발해 도성은 고구려 도성과 상당 부분 닮은 점이 확인되고 있고 당 장안성과의 차이점이 많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발해의 5경제는 요와 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하였다.
한편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5부를 상징하는 5경을 설치했다는 의견도 있으며 당의 4경제도에 대한 대항의식에서 5경을 설치하여 지방행정의 중심도시로 삼았다는 의견도 있다.
(3) 5경의 기능과 수도 변천
- 구국(舊國)
구국은 5경에서 제외되지만 첫 수도였다는 데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첫 건국지로 삼은 곳은 지금의 길림성 돈화 지역 성산자산성으로 여겨지는 ‘동모산’이었다. 『구당서』발해전에 “……동모산에 의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와 『신당서』발해전 역시 “……부중을 거느리고 읍루의 동모산을 확보하고 성곽을 쌓았다”라고 하였다. 고고연구가 진행되면서 발해가 맨 처음 나라를 세웠던 곳은 오늘날 중국의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산일대로 보게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고 당에 의해 영주 부근으로 강제 이민당하였던 유민들은 30년만에 고향을 찾아와 동모산 아래에 나라를 세웠는데 그곳이 바로 성산자산이라는 것이다. 동모산에 건설된 도성은 발해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목단강 건너 영승유적을 주목하고 있다. 종래에는 돈화시내의 오동성터를 첫 도성유적으로 보아왔으나 回자형의 이곳 유적이 요나라 시기의 것으로 간주되어 오다가 육정산 고분군을 끼고 있으며 이에 대한 유물이 수집되면서 구국터로 유력시된 것이다. 이 지역이 발해의 첫 도읍지였다는 사실은 발해왕족과 평민들의 육정산 고분군이 발견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발해가 이곳에서 수도를 정한 이유는 국력신장과 인구증가에 따른 경제 문제가 가장 컸을 것이다. 무치에서 문치로 정책 이념을 바꾸는 과정에서 군사적 기능이 강했던 구국을 버리고 두도평원의 넓은 들판과 두만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는 중경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발해 건국 초기의 동모산은 발해 건국과 적대세략의 방어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군사적 역랑을 충실히 하였던 곳이었다.
- 중경 현덕부(中京 顯德府)
발해의 두 번째 수도였던 중경이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 화용현의 서고성자로 확정되기 까지는 20세기 초반 일제의 발굴 조사 등을 비롯한 고고학적 성과에 힘입은 바도 크다. 서고성이 발해의 중경현덕부라는 주장은 도리야마 기이치 등이 구체적으로 제기하여 1980

참고문헌

본 자료는 참고문헌이 없습니다.
저작권 레포트월드는 “웹사이트를 통해 판매자들이 웹서버에 등록한 개인저작물에 대해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공자(Online Service Provider, OSP)” 입니다.
발해의 5경과 강역에 대한 역사학적, 고고학적 접근 게시물의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를 등록한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이 침해된다고 확인될 경우 저작권 침해신고 로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환불정책

추천 레포트

  • 발해,누구의 나라인가?
  • 발해,누구의 나라인가? 남북의 학계가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게 될 때 빠지지 않을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발해사 연구`일 것이다, 왜냐하면 발해의 영토가 우리나라의 북한지역, 러시아의 연해주지역,중국 만주의 중부지역과 동부지역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나라 모두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얽혀있는 것이다. 더구나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정통성을 직접 이은 나라가 없기 때문에 발해사의 성격 규정을 둘러싸고 주변국들간에 복잡한 문제가 야기되고 있으며 지금도 나라마다 주장이 다르다. 이러한 자의적 입장은 우리의 경우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그 동안 발
  • 발해에 대한 자료
  •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겼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래 그것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
  • 발해국의 건국과 역사
  • 발해국의 건국과 역사 발해국의 흥기 서기 698년부터 926년까지 우리 나라(중국) 동북의 아름다운 장백산과 흑룡강(백산흑수) 사이에 말갈인이 건립한 발해국 정권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권은 결코 현대의 독립 국가와 같은 성질을 띄지 않았고, 다만 당시 대당 봉건 제국(대당봉건제국)의 중앙에서 관할하는 변경의 한 주(주)였는데 홀한주(홀한주)라고 하며 순전히 봉건 할거 세력이었다. 당(당) 초기부터 변방 각 소수민족 집단의 거주 지역에 부(부)와 주(주)를 설치하고 상층 인물들을 자사(자사)나 도독(도독)으로 임명하여 조정을 대신해서 직접 그 부의 민족을 관
  • 발해 수공업 철기제품 중심으로 분석
  • 발해 수공업 철기제품 중심으로 분석 Ⅰ. 머리말 발해에 대한 문헌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헌을 통해서 발해의 수공업을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2차대전 이후 중국, 러시아, 북한에서 발해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가 이어지면서 다량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유물들은 바로 발해의 수공업 제품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발해의 수공업을 상당 수준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축적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수공업사 분석은 양적으로 아직 대단히 미약한 편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방면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발해의
  • 발해사에 대하여
  • 발해사에 대하여 한국사에 있어서 커다란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으로서 한국전쟁을 들 수 있다. 45년 전 강대국들의 편의에 의해 무심코 그어졌던 한반도의 분단은 전쟁으로 인해 더욱 그 골이 깊어져 전쟁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에는 영토의 분단, 민족의 분단에 이어 마음의 분단으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45년 이후부터 찾을 수 있다. 나라가 분단되고 난 뒤 서로 다른 체제에 따라 전체 민족사회를 건설하려는 요구는 남과 북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했다. 남한은 자본주의에 기초한 단독정부를 세우고 멸공통일, 북진통일을 주장했으며, 북한은 사회주의적 통일과 북
최근 본 자료
최근 본 자료가 없습니다.
카카오 채널
청소해
  • 장바구니
  • 다운로드